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 (문단 편집) == 배경 == '○차 범국민 행동'이라고 번호를 붙여 부르던 집회 이름이 이번에는 '''"박근혜 즉각 퇴진의 날"'''로 바꿔 지난 29일 [[박근혜]]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대통령의 해명#s-4|3차 대국민담화]]에 대한 분노 표시임을 명확히 했다. 헌정 사상 최초로 청와대 100m 앞까지 행진을 허용했다. 주최 측에서는 분수대가 있는 청와대 앞 30m까지 허가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집시법 11조의 금지규정[* 주요 국가기관 및 외국의 외교기관 반경 100m 내에서는 시위가 금지된다.][* 다만 외국 [[대사관]]은 이번 집회는 외국 대사관에 대한 집회가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도 휴일에는 11조 4항의 예외규정이 적용되어 근처에서도 시위를 할 수 있기 때문에 광화문 앞 미국 대사관도 정문만 경찰차벽으로 막은 것.]에 따라 법원에서는 법이 허락하는 최대한의 범위를 허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1월 29일까지 야간에도 청와대 앞 200m 밖에서 시위를 계속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 둘 다 서울행정법원 김국현 판사가 허가했는데 이 때문에 반대 측에서는 "[[정게할배|전라도 출신 판사 놈이 허가를 내줬다]]"고 성토하고 있지만 정작 허가를 내준 판사는 경북 안동 출신에 [[안동고등학교]]를 나온 사람이다. 게다가 판사 임용 후 근무지 또한 전라도 지역에서 근무한 적도 없다.(대전→수원→서울) 원래 [[5차 범국민행동|11월 26일 집회]]를 마지막으로 광화문에서 하는 대규모 집회는 예정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12월 2일로 예정돼 있던 탄핵 소추안 처리 일정이 [[박근혜|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에 따른 [[새누리당]]의 입장 번복 및 [[국민의당(2016년)|국민의당]]의 망설임으로 늦춰지자 주최 측에서 11월 29일에 대국민 담화 직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이 날 집회를 다시 진행할 것으로 발표함으로써 일어나게 되었다. 3차 대국민 담화 이후 여당에서 4월 퇴진론 카드를 들고 나왔고, 야당들도 분열할 징조가 보였다. 하지만 이번 시위에 오히려 저번 때 보다 참가자가 늘어 [[박근혜]] 대통령의 무조건 즉각 하야, 혹은 국회의 [[탄핵]] 말고는 받아들일 생각이 없음을 국회와 정부에게 똑똑히 알려 주었다. 즉 '''이 집회를 계기로 비박계가 탄핵 표결에 참여하기로 결의하였고, [[친박]]마저 반수 이상의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하였다.'''또한 이날 집회는 서울 집중 집회가 아닌 지방 분산을 주안점으로 삼았는데도 역대 최대 인원이 참가한 것으로 나타나서 대통령과 정치권에 대한 실망과 우려를 제대로 보여 준 집회로 평가된다. 위에도 인용된, 원내에서 탄핵 교섭을 총지휘한 우상호 원내대표의 인터뷰에 따르면, 탄핵 표결이 예정됐던 12월 2일 당시까지도 탄핵에 필요한 안정적 찬성표를 확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청와대의 로비가 집요했으며, 특히 박근혜가 던진 4월 퇴진 6월 대선 승부수가 비박계에 먹혀 들어가면서 25 ~ 40표의 찬성표가 매일같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원내의 확고한 탄핵지지세력 171명에 더해 가결을 위해선 최소 29표가 필요한 상황에서 앞날을 장담할 수가 없었던 것. 그런데 사상 최대 규모의 집회가 열린 후부터 표 계산이 안정화되기 시작했으며, 탄핵 당일엔 최소 230표가 확보됐다고 확신했다고 한다. 촛불 시민들께 큰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http://m.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0459|*]] 6일 뒤인 12월 9일에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국회에서 찬성 234표, 반대 56표, 기권 1표, 무효 7표로 가결되면서 여당이 주장했던 4월 퇴진론을 박살 내고 탄핵안 가결에 큰 영향을 끼친, '''[[대한민국 제6공화국|제6공화국]]의 역사를 바꾼 집회'''가 되었다. 거기다가 이후 국회의 탄핵소추안 부결 시 [[2017년 계엄령 문건 사건|쿠데타가 발생했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이 집회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드러났다. 이날은 그야말로 역사에 보기 드문 희대의 대분기점이었던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